16. 향기를 품은 꽃 '세이지'

  나는 나 스스로를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흑과 백, 좌와 우를 무 자르듯 가르는 성질머리를 보면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제 버릇 개 주겠는가. 둥글둥글 모나지 않은 것이 좋다고들 하지만 나라고 어디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이래도 저래도 흥흥. 네네.

  내가 지닌 오감 중에서 가장 발달한 부분은 후각인 것 같다. 이 부분이 민감해서 냄새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한 편이다. 한겨울에도 하루에 두 세 번은 문이란 문을 죄다 열어젖혀야 직성이 풀린다. 

음식냄새 때문이다. 먹을 때까지의 기쁨은 잠시, 어떤 곤혹스런 냄새는 이틀을 갈 때도 있다. 남편은 닫고 나는 열어젖히고, 어쩌자고 신은 이리도 복잡하게 인간을 창조했는가. 다르게 만들었는가. 이럴 때만 ‘신’이란 단어를 둘러대서 그분의 존재를 찬양하는 분들에게 살짝 미안하다.

말하기 거북한 사정이 따로 있었다. 이성으로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후배가 아니라 남자로 여겨지지 않으니 혼인이 되겠느냐 말이다. 나의 고민은 진정 이것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다른 이유로 입방아를 일삼았다. <본문 중에서>

  우스갯소리를 하고 지나야겠다. 나와 남편은 대학 선후배 사이다. 나이는 내가 두 살 더 많다. 10년 이상을 선후배 관계로 지내오던 어느 날 나는 모종의 작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가 선배인 나에게 감히 청혼을 한 것이다. 

여러 후배들과 교수님까지 합세하여 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연상연하 커플이 많지 않았던 때였고, 나는 노처녀로 낙인이 찍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한국사회가 어떤 사회더란 말이냐. 마치 내가 흉허물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었다. 

쓸 만한 남자들은 이미 혼인한 상태였고 나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 후배라 여겨 말도 함부로 놓고 꺼떡하면 등짝을 후려치는 등 조심성 없게 행동한 것은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말하기 거북한 사정이 따로 있었다. 이성으로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후배가 아니라 남자로 여겨지지 않으니 혼인이 되겠느냐 말이다. 나의 고민은 진정 이것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다른 이유로 입방아를 일삼았다. 그런 게 아니라고요! 남세스러운 이 말을 어떻게 꺼내어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하느냐고요!

  그러던 어느 날 때가 왔다. 이 후배에게서 남자의 향기가 느껴진 것이다. 영화관 안이었고 화장품 냄새였다. 손을 잡았던가? 아마 잡기도 했던 것 같다. 내 손에서 맡아지던 낯선 향기... 얼마 후 나는 그의 청혼을 수락했다. 그리고 오늘까지 삼십 몇 년을 싸구려 화장품 냄새에 발목이 잡혔다. 

그동안 나에게 그와 혼인하겠다고 결정한 이유가 궁금해 하던 지인들 이제  아셨나요? 나 이현옥! 이처럼 사소한 것(『이처럼 사소한 것들』 / 클레어 키건)에 운명을 걸었던 사람이다. 평생 족쇄가 될 줄을 모르고 말이다. 

지금도 이 남자에게서 그때의 향기가 맡아지냐고요? 천만에요. 상상에 맡기겠다. 이 남자와 가약을 맺게 한 것이 냄새였다는 것을 오늘 만천하에 공개하는 바이다.

  한 가지 일화가 더 있다.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시어머니가 담가준 김치 속 MSG 냄새가 역겨워 그 김치를 몽땅 버린 적이 있었다. 멀쩡하던 몸이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 그 냄새가 그렇듯 반응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나는 되도록이면 좋은 냄새만 취사선택하여 맡고 싶다. 언젠가 10월 말경 군산 신흥가옥 입구 오른쪽 모퉁이에서, 마음이 거시기 한 날 춘포의 달빛소리수목원에서 은목서의 꽃향기에 취한 적도 있다. 이 꽃이 샤넬 No.5 향수의 원재료라는 얘기를 들었다. 참고로 나는 향수와 그리 친하지 않다. 자연의 향기를 좋아할 뿐이다. 

세이지는 작은 꽃잎에 하얗고 붉은색을 갖고 있다. 한창 올라올 무렵 글을 썼어야 했는데 이런저런 식물들에 순위가 밀려났다. 지금도 예닐곱 개의 꽃잎이 매달려 있다. 잊을 만하면 가끔 올라온다. 절정은 언제였을지 내년에 관찰해야겠다. <본문 중에서>

  꽃을 유난히 좋아하는 독서모임 여자 후배가 사온 허브‘세이지’(정확한 명칭은 핫립 세이지)의 사설이 참으로 길어졌다. 식재할 공간을 배치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나와는 반대로 이 친구는 앞뒤 좌우 두어 번 둘러보고 후다닥 장소를 정했다. 

모종삽으로 깔쭉깔쭉 몇 번 흙을 파내고는 쑥 앉혀 버린다. 외모와는 달리 손이 재바르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생소한 이름의 ‘세이지’, 신통찮아 보이는 저까짓 게 꽃을 피울까 싶었다. 향기를 품고 있을까 싶었다. 만져줘야 향기가 난다고 했다. 사람 손이 어지간히 타야 할 식물인 것 같아서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세이지 배치는 현명했다. 내가 자주 오가는 곳에 심어놨으니 그렇지 않아도 냄새에 민감한 나는 오며가며 주물주물 만져준다. 그 손바닥을 코끝에 대본다. 잠시나마 시름도 잊는다. 싸리나무 마냥 가늘가늘한 게 그 후배와 똑 닮았다.

  세이지는 작은 꽃잎에 하얗고 붉은색을 갖고 있다. 한창 올라올 무렵 글을 썼어야 했는데 이런저런 식물들에 순위가 밀려났다. 지금도 예닐곱 개의 꽃잎이 매달려 있다. 잊을 만하면 가끔 올라온다. 절정은 언제였을지 내년에 관찰해야겠다.

  꽃이 있든 없든 기막힌 밤이 지나갔든 어쩌든 세이지의 향기는 여전하다.

  아, 우리 살아있구나. / 이현옥

글쓴이 / 이현옥 전 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